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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로컬리티와 이주민-1945년∼1960년대를 중심으로-

Bupyeong Locality and Migrant -Focusing on the Period of 1945∼1960’s-

발행
2010
소속·발행
부산대학교
출처
국내 KCI
UCI
G704+INS000004686-ART001478196
원문등록
2010-09-0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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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키워드

로컬리티, 이주민, 부평, 전재민, 피난민, 기지촌, Locality, Migration, Bupyeong, War Victims, Refugees, Military Campside Town

초록

일제 말기 부평에는 유수한 일본 독점자본의 군수공장과 육군조병창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토목기술자와 일용직 인부, 그리고 공장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혹은 일본으로부터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부평이 일본 독점자본이 의도했던 초국적 산업공간 즉 대동아공영권 내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던 공간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공장 가동은 중지되었고, 부평역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어서비스업종이 발달한 정도였다. 지리적 여건상 부평은 해방 직후 일본이나 상해 북경 등 중국으로부터 귀환하는 동포들의 정착지로 기능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주로 평안도, 황해도 지역 피난민이 인천항을 통해 유입되어 부평에 정착했다. 전재민이나 피난민들은 개별 단위로 산발적으로 정착하기도 했으나, 대개 피난민수용소 시설이나 혹은 간석지나 황무지 개간과 같은 정착정책에 의해 집단적으로 터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원주민들은 강한 생활력을 가진 피난이주민들의 경제력이 원주민보다 우월해지고, 이들이 부평시장의 상권을 주도하는데 대해 질시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전재민과 피난민의 집단수용소, 상이군인들의 집단농장, 한센병환자수용소와 형무소, 부랑자교화시설 등이 다수 입지한 곳이라는 부평의 이미지는 곧 ‘타자성의 로컬리티’로 투영되었다. 부평은 1940년에 인천부로 편입되었으나, 부평민들은 여전히 부평지역이 인천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차별받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950, 1960년대 부평 이미지로 표상되는 또 한 가지는 애스컴과 주변 기지촌이었다. 해방 후 미군이 일본 육군조병창을 접수함으로써 형성된 애스컴과 기지촌은 이 시기 부평 지역경제의 구심점이었으니, 미군부대 취업과 미군 및 기지촌을 상대로 한 자영업과 기타 상업활동을 목적으로 타지인들이 부평으로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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